“엄마, 엄마 나 보여?"
중환자실 면회를 온, 내 또래의 딸 보호자가 의식이 혼미해진 환자를 소리쳐 흔들며 부른다.
“지..혜야..”
‘엄마’라는 소리를 들은 환자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황달로 노래진 눈을 딸에게 겨우 맞춘다. 수염이 덥수룩 한 남편 보호자의 눈시울이 동시에 벌개진다. 오랜 간병으로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내가 1월에 수술 받으러 가기 전까지는, 혼자 입원해 있던 환자이었다. 51세의 나이에, 진행성 간암으로 마땅한 치료를 찾지 못했고 경제적 상황도 좋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새, 상태가 손쓸 수 없이 나빠졌고, 콩팥 기능마저 악화 되며 3일 전 중환자실로 이실했다.
보통의 병원 상황이었다면, 적극적인 투석과 삽관 등의 치료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설득 했을 텐데, 그럴 여력도, 염치도 없었다. 시간을 잠시 벌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심정지가 오게 되고, ’코드블루’ 가 울리면, 흉골이 다 부서지는 심폐소생술이 불가피하게 된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얼마 남지 않은 환자의 마지막도, 의료진의 에너지도 온통 소모 시키기만 할 거였다. 나아질 구석은 없고 나빠질 일만 가득한 상황에, 지친 환자와 의료진을 무방비하게 방치할 순 없었다. 보호자들은 면담 후,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는 내 말에, 환자의 아들이 울먹 거리며 말한다. “최대한 덜 아프게, 고통 없이 가실 수 있게 해줄 수 있냐고.” 나는, 그러겠노라고, 환자가 최대한 덜 힘든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의대증원 강행 발표와 전공의들의 사직 소식을 듣고, 병가 휴직을 자체 종료하고 병원으로 복귀했다. 눈물이 흐르고 흉터로 짓무른 눈을 뿔테 안경으로 가리고 돌아가는 내게, 주변 사람들과 교수님 마저 ‘너 하나로 바뀌는 것은 없다’며, ‘건강 챙기는 것이 최우선’이라 했다. 하지만, 모른척 밖에서 보고만 있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덜 아픈 죽음을 도와줄 수 밖에 없었다. 바이탈을 잡고 싶었던 나는, 놓아주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서로의 얼굴을 보여준 것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모두의 마음이 훨씬 더 처참하고 슬플 뻔 했다.
이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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