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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일기16

나의 슬픈 최선, 필수의료 “엄마, 엄마 나 보여?" 중환자실 면회를 온, 내 또래의 딸 보호자가 의식이 혼미해진 환자를 소리쳐 흔들며 부른다. “지..혜야..” ‘엄마’라는 소리를 들은 환자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황달로 노래진 눈을 딸에게 겨우 맞춘다. 수염이 덥수룩 한 남편 보호자의 눈시울이 동시에 벌개진다. 오랜 간병으로 지칠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내가 1월에 수술 받으러 가기 전까지는, 혼자 입원해 있던 환자이었다. 51세의 나이에, 진행성 간암으로 마땅한 치료를 찾지 못했고 경제적 상황도 좋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새, 상태가 손쓸 수 없이 나빠졌고, 콩팥 기능마저 악화 되며 3일 전 중환자실로 이실했다. 보통의 병원 상황이었다면, 적극적인 투석과 삽관 등의 치료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설득 했을 텐데, 그럴.. 2024. 2. 27.
서울의 봄 #서울의봄 을 최근에야 보았다. 2023년 연말에 개봉해 누적관객수 천삼백만이 넘은 영화다. 현 정권의 폭탄 같은 필수의료 패키지와 의대증원 발표 후 전공의들의 임시대의원총회가 새벽까지 이어지던 날이었다. 여러 모로 마음이 혼란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던 밤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일었다. 파워 게임에서 밀려 정의와 원칙이 손쓸 수 없이 무너지는 과정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의 정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으나, 역사가 말해주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배한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사실. Winner takes it all.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합동수사본부장 전두광(배우 황정민)과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배우 정우성)이 대치하는 장.. 2024. 2. 16.
의사가 된 과학 영재의 배신 공대 합격자의 의대 이탈에 대한 뉴스가 연일 화제였다. 의대 정원 확대 이슈와 의사 과학자 양성에 대한 토론도 계속된다. 자격이 될지 모르겠지만, 욕먹을 각오와 함께 내가 학창 시절 느낀 바를 꺼낸다. 소개부터 하자면, 나는 일종의 배신자다. 중학교 때 두 군데의 과학영재원에 합격했고, 당시 대한민국 유일한 영재고였던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카이스트 (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 했으나, 후배의 죽음을 계기로, 경로를 틀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내과 의사가 되었다. -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가득해 늘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나는, 과학과 생명 활동에 관한 공부가 무척 재미있었다. 영재교육원에서 실험을 구상하고 창의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고, 친구들과 토론하는 과정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 2024. 1. 25.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죽음은 이슈가 된다. 특히 유명하고 자극적인 스토리일 수록 사람들은 이를 소비하고자 한다. 생에 가까웠던 한 존재와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난도질 하는 이들은, 죽은 이도 평안히 죽도록, 산 이도 평안히 살도록 도통 내버려 두질 않는다. 20대 시절, 가까울 수 있었지만 미처 눈치조차 못 챈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나는 몇 차례나 또래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죽음은 어느덧 삶에서 꽤나 가까운 단어가 되었고, 내과 의사가 된 나는, 타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내는 일을 하게 됐다. 한때는 찬란 했을 수많은 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고인 곁에 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중요한 .. 2023. 12. 31.
나는 나쁜 의사인가 (내과 전공의 3년차 시절 작성한 글입니다) 2주일 전, 우리 파트 1년차 선생님이 내과 수련을 포기했다. 평소 근면성실하고 열심이던 분이었는데, 아마 내과 의사로서 늘 맞닥뜨리게 되는 중환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원인 이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만두게 한 원인을 분석 하고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첫 주는 행정상 휴가 처리를 한 채 다들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나 또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그렇다고 따로 연락해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파트 시니어 로서 할 일은, 그가 맡던 환자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그저 묵묵히 공백을 메꿔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주가 흘러갔다. 2년차 휴가 백을 포함하면 3주 째 차트를 잡고 있다. 그간 벌.. 2023.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