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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84

아쉬운 끝맺음과 새로운 역할 2년 간의 소화기내과 펠로우 수련 과정이 끝이 났다. 얼굴뼈가 깨지고 한쪽 눈을 실명하는 사고를 겪고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여섯 번 반복된 전신마취 수술과 세 번의 치열한 복귀, 두번의 거절 끝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생각해보면, 참 고집스럽고 독한 과정이었다. 1년간 동고동락한 동기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2년차로 남아 후배들과 또다른 1년을 보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선택에 책임지며,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 이었다. 그 끝이 어떨지 마음 속으로 백번도 넘게 그렸지만, 지금과 같은 혼돈은 예상하지 못했다. 남겨진 이도, 떠나야 하는 이도, 못내 아쉽고 참담하다. ‘이제 어디로 가니?’ 라는 질문에, 곧 다시 환자복을.. 2024. 3. 1.
그린북 Green book 새해에 수술을 받고 방문한 외래 진료에서, 또 다시 새로운 수술 일정을 잡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퇴원한지 얼마 안 되어 눈물이 줄줄 흘렀기 때문이다. ‘눈물길이 막혔구나.’ 예상은 했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제 7번째 전신마취 수술이 될 터였다.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를 자꾸 반복하고 있는 거 보면, 함부로 ’마지막이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되는가 보다. 퉤퉤퉤 사실 최근 수술 후 몸도, 마음도 지쳐서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약을 바르려고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새로 난 흉터와 무감각, 부은 얼굴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청룡처럼 앞으로 나아갈 거라 기대한 새해가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탓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정신을 차리고 밖에 나갔다. 퇴원 후 3일 째.. 2024. 2. 9.
재경험, 그리고 다시 용기 그토록 피하고자 애썼던 얼굴 (좌측 안와) 재수술을 받게 되면서, 1년 만에 많은 증상들을 재경험 하는 중이다. 첫째로는, 눈꺼풀이 다시 닫혔다. 기적처럼 떠 졌던 왼쪽 눈꺼풀이었는데 말이다. 처음 다쳤을 때는 슬퍼 보이는 U 모양 이더니, 지금은 웃는 ^ 모양으로 감겼다. 덕분에 이제는 진짜 #윙크의사가 됐다. 그동안 많이 웃으려 애쓴 보람이 있는 것인가. 역시 평소의 표정에 따라 사람의 얼굴 형태는 변한다. 둘째로는, 피부 감각이 아예 사라졌다. 이전에도 꽤나 무뎌있던 터라 그러려니 했는데, 코에서 뭐가 흐르는 것도 못 느끼는 것은 좀 곤란하다. 병원에서 신나게 찍은 셀카를 보니, 코피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결국 옷에 흘렸다. 엄마는 코흘리개라 놀리며 거울을 자주 보라는 조언을 해줬다. (앞으로.. 2024. 1. 28.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 하고 싶은 것이 유독 많은 사람이 있다. 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너무 잘 참으며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은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무언가 행동을 할지 말지를 결정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지에 대한 여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해야 되는 일인지와, 할 수 있는 일인지가 중요했다. 이런 일들에 우선순위가 밀려서, 하고 싶은 일들은 나의 무의식 저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곤 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여태 참아 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다. 보통 인간의 욕구는 충족되면, 마치 존재했었냐는 듯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뭔가를 열망하는 욕구는 언제나 충족되기 전까지의 찰나의 순간에 불과.. 2024. 1. 21.
엉망진창의 매력 나를 잘 모르는 분들은, 내가 아주 엘리트에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가까이서 보고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시간 약속을 잘 못 지키는 것은 기본이요, 넘어지고 깨지고 놓치고 잃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오죽 하면 내 매력의 8할은 예상치 못한 엉망진창 허당끼 반전미에서 나온다고도 한다. 이어령 교수님은 에서 미국이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엉망진창의 힘이라고 얘기하셨다. 엉망진창의 민족끼리 섞여서 엉망진창으로 살지만, 그 엉망진창에서 나오는 창의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2024.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