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쉬기로 한 이후에도 나는 왜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한쪽 끝에서는 ‘욕망’이, 또 한쪽 끝에서는 ‘불안’이 나를 양 끝으로 찢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하고픈 것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많아서 파묻힐 정도로 과한 욕심은 독이리라.
진짜 쉬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피눈물 때문은 아니고 사실은 피똥 때문이었다. (좀 부끄럽지만 뭐ㅋ) 수술 후 4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잃을 정도라 화장실에 수건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시뻘건 혈변이 똑똑 나왔다.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수도없이 봐왔던 환자들 사진과 똑같이..
갑작스럽고 극심한 LLQ (left lower quadrant, 배를 4사분면으로 나눴을 때 좌측 아랫면을 말한다) 복통에 이어지는 소량의 혈변. 증상을 보면, 허혈성장염(Ischemic colitis)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장 혈관에 산소 전달이 잘 안 되어 장에 염증이 생기고 심하면 괴사까지 진행하는 경우다. 이상한 것은 호발 나이였다. 보통 내가 전공의 때 입원시킨 환자들은 다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고, 실제 혈류가 안 좋은 노인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내 몸에 발생한 모든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내 전문 영역은 아니었다. 학생 때 배우긴 했지만, 이후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영역. 그래서 수동적인 환자로 의지할 수 있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다르다. 이젠 내 영역까지 왔다. 엄마는 눈코입으로 피가 나더니 이젠 피가 똥X에서까지 나냐고 놀렸다. 도대체 나는 내 몸을 어떻게 관리 했길래, 내 영역까지 엉망이 되도록 방치한 걸까.
배우 이제훈이 허혈성대장염으로 수술하게 되어 부산국제영화제 사회자로 참석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 배우도 젊은 나이인데, 참 스트레스도 많고 바쁘게 살았겠구나. 몸을 잘 챙길 여력이 없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짠했다. 남이 아픈데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았고, 또 한편으론 잘 낫길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다시, 일상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나는 달리는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매우 힘이 든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자 내재된 욕망이기도 하고, 혹은 보여 주고픈 강박이면서 삶에 대한 책임감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은 간만에 한강에 나가 5km 달리기를 하려는 데, 2km 채 못 달린 시점에서 LLQ 부위에 또 다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당시 염증이 생겼던 부위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오면, 아마 간헐적으로 증상이 재발하는 것 같다. 배를 부여잡고 계속 뛰던 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어느 순간 뜀박질을 멈춘다.
멈춤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예전 같으면 나약한 핑계, 혹은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단어다. "Sometimes you need to slow down if you want to go faster " 나이키러닝 어플에 나오는 코치 베넷 아저씨가 적절한 순간에 저 말을 던진다. 어쩌면 성숙해지는 또, 노련해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악바리와 독기를 잠시 내려놓고 멈췄다. 예전 같은면 아파도 끝까지 해내는 것이 뿌듯했을 나인데, (사실 지금도 더 달리고 싶기도 함) 인간이 바뀌는 것은 이토록 큰 계기가 필요한 일이다. 또 다른 인생의 교훈 하나를 얻었고, 배도 이제 안 아프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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