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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

실명 소식을 들은 동생은

by 윙크의사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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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별명이 울보였던 내 동생 연수는, 1993년생으로, 나와는 3살 터울의 여동생이다.

 

유치원 때부터 자주 울음을 터뜨렸던 연수는, 욕심 많고 적응력이 빨랐던 나와는 꽤 다른 아이였다. 겁도 많고 그저 순진하고 착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이용당하는 일도 잦았다. 그런 일을 당하는 걸 보면 괜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언니인 나조차도 그 점을 이용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7살 때쯤, 할머니 집 탁자의 백열등 전구가 신기해 다가갔다가 이마에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어른들에게 혼날까 봐 걱정된 나는 동생이 밀었다고 거짓말을 했고, 영문 모른 채 4살짜리 동생은 그렇게 (가짜) 가해자가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해 동네에서 유명했기에 (별명이 올백이었다), 동생은 본인 이름보다는 ‘서연주 동생’으로 더 많이 불리곤 했다. 어딜 가나 ‘오, 네가 연주 동생이야?’라는 말을 들었고, 그만큼 부담스러운 기대와 시선을 견뎌야 했다. 가족들에게도 늘 동생보다 내가 먼저였다. ‘연주 먹고 싶은 것’, ‘연주 갖고 싶은 것’ 이 매번 우선이었고, 동생은 쓰던 것을 물려받았다. 오죽하면 동생과 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그랬다. ‘수’에 작대기 하나 그으면 ‘주’가 되어 물려주기 편해지니까. 그렇게 동생은 ‘연주’라 쓰인 가방까지 메고 다니며,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존재로 지냈다.

 

나 같으면 질투도 생기고, 억울함도 생기고, 그러다 밉기도 했을 것 같은데. 착한 동생은 그런 티를 전혀 낼 줄 몰랐다. 언니와 비교당하고 울면서 들어올지언정, 동생은 변함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니 동생이라 좋아. 나는 언니가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내 동생은 정말 그랬다. 진실하게 꾸준히 나를 자랑스러운 언니로 존중해주었고, 사춘기 시절 못되게 굴던 나를 여러모로 품어 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 늘 바쁜 척하며 밖으로 나돌던 나 대신, 동생은 알뜰살뜰 부모님을 챙겼다. “언니 집에 좀 와~ 엄마가 보고 싶어 해.”라며 엄마 대신 할 말을 전했고, 나 대신 집에서 장녀 역할을 해냈다. 늘 ‘연주’가 먼저였던 부모님 곁을, 나 대신 ‘연수’가 지켰다. 대신해서 많은 것을 해주는 동생 덕에 나는 한결 가볍고 자유로웠다. 그렇지만 내가 가벼워진 만큼 무거운 책임은 그렇게 동생 몫이 되고 말았다.

 

내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실려 왔을 때, 겁 많은 울보 동생 연수는 응급실 문 앞까지 와서도 우느라고 들어 오지를 못했다. 평소 자랑스러워하던 언니의 다친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웠는지, 그렇게 한참을 밖에서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진통제 때문에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로 기다렸지만, 끝내 동생 연수는 응급실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응급 수술방으로 실려 가는 이동식 침대 위에서, 나는 멀리 울먹거리는 동생 형체만, 동생은 삐져나온 내 발끝만 겨우 보았을 뿐이었다.

 

자정이 넘어 끝난 수술 후 나는 입원 병동으로 올라갔다. 이후 코로나로 인한 면회 금지 정책 때문에 동생을 물리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가끔 아빠가 생필품을 전해주러 들르셨지만, 동생 연수는 그 긴 입원 기간 내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사고 이전에 그랬듯, 그저 가족 카톡방을 통해 서로 안부를 나눌 뿐이었다. 사고 당일 응급실 문 앞까지 왔으면서도, 나를 보러 들어오지 않은 (혹은 들어오지 못한) 동생이 한편으론 서운하고, 또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매사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생과 매사 빠르고 과감했던 나. 같은 배 속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너무나도 다른 동생과 나이지만,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게 있었다. 내 오른 얼굴 일부와 동생 왼팔 전체를 차지하는 ‘커피색 반점’이다. 내 것은 작고 옅어서 화장으로 가려지지만, 동생 것은 수십 배는 더 클뿐더러, 마치 화상 흉터처럼 등부터 팔 전체를 덮고 있어 눈에도 잘 띄었다. 어릴 때는 반점 때문에 주변에서 놀리고 따돌림을 시키기도 해서, 동생은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긴 팔만 입고 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캐나다에서 보낸 동생이, 외국 애들은 피부의 반점으로 놀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았다고 할 정도로, 동생에게 반점은 큰 스트레스였던 것이 분명하다.

 

세월이 지나고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딱히 방법이 없다 들었던 ’ 커피색 반점’ 또한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이십대쯤이었을까 나는 부모님을 졸라 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했고, 처음에 반색을 표하던 동생이 “언니는 얼굴이니까 해야지. 나는 이제 익숙해서 괜찮아.”라며 물러서는 게 아닌가. 당시는 동생이 치료받기 싫거나 무섭거나, 혹은 정말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양보가 익숙했던 동생은, 치료비가 비싼 것을 알고는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동생 팔의 큰 반점은, 인제 와서야 그 마음을 알아차린 나에게도, 당시 둘 다 해줄 여력이 없었던 엄마에게도 여전히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늘 자랑스러워하던 언니가 크게 다쳐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며, 동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18일이 지나고 퇴원해 본가로 돌아가 연수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동생은 담담하게 나와 부모님을 살피고, 필요한 것을 챙겨 주었다. 차에 흠집을 많이 냈다고 평소처럼 나무라기도 했고, 졸지에 외눈 신세가 된 나를 차에 태워 조심스레 이곳저곳 데려다주기도 했다.

 

퇴원 2주차에 안과 외래를 방문할 때, 턱 하니 휴가를 낸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을 다녀왔다. 엄마는 오랜만에 두 딸과 함께한 외출 이라서 그런지 기뻐 보였고, 나도 동생과 함께 있으니 든든하고 좋았다. 하지만 휴가까지 내고 쫓아온 행동이 이해되진 않았다. ‘바쁠 텐데 굳이...‘ 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토록 다른 언니와 동생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외래 때, 엄마는 “지금까지 말은 안 했는데, 연수가 너 실명 소식 처음 듣고 뭐라고 했는지 아니, 나 정말 놀랐어.”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수가 너 실명했다는 소식 듣자마자, 자기 눈 빼 주겠다고 하더라.
자기는 앉아서 컴퓨터 작업만 하면 되니까 눈 하나라도 상관없는데,
언니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나보다 눈이 더 필요할 거라고.
자기가 안구 이식해 주겠다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과연 동생이 사고로 한쪽 실명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내 눈을 빼줄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그날 그렇게 응급실 밖에서 우느라고 날 보지 못한 내 동생 연수는, 대신 본인의 눈까지 내어줄 마음마저 먹고 있었다고 보다.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못난 언니를 용서해다오.

 

원래, 못 해준 사람이 그만큼 더 아프고 했나. 천천히 조심스러운 성격이지만, 그만큼 더 깊고 믿음직한, 너무나도 예쁜 내 동생이다. 동생의 당연했던 양보와 스며들듯이 익숙했던 배려를 절대 잊지 않기로 다짐한다. 어릴 때 나로 인해 못 누린 만큼, 이제는 세상을 더욱 넓고 재미나게 누릴 수 있게 해줘야지.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아직은 못나고 철없는 언니지만, 앞으로 남은 생은 동생이 포기하려 했던 한쪽 눈의 은혜만큼, 조금씩 갚으며 살아야지, 하고.

동생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던 촬영, 울음이 터져 꾸앵 샷으로 끝났지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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