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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의사 일기

수현이

by 윙크의사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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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현이가 눈을 다친 지 4년 째 되는 날, 처음 만났다.

심장 공부가 재밌어 인터벤션 전문 간호사가 된 수현이는,
4년 전 오늘, 응급 시술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술대를 정리하던 중,
납안경을 낀 눈을 차폐막에 부딪히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최근 수현이는, 내가 다치고 복귀하며 SNS에 쓴 글을 읽고는,
본인이 느낀 감정과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어온 수현이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자꾸 왼쪽 어깨를 이유 없이 세게 부딪히는지 (그저 내가 부주의한 줄로만 알았다)
왜 기존 관계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었는지
왜 이따금씩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이 찾아오는지

우리는 서로가 부러웠고, 또 그래서 서로가 대단해 보였다.

나는 겉으로 동일해 보이는 수현이의 양쪽 안구 모양이 부러웠고,
수현이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나의 남은 쪽 시력이 부럽다고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뾰족하고 뚜렷한 수현이가 대단해 보였고
수현이는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현재의 자신을 꺼내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휴머니즘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아픔을 숨기지 않고 나누는 위대함.
그 과정에서 오가는 따뜻한 위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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