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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 우리는, 수현이가 눈을 다친 지 4년 째 되는 날, 처음 만났다. 심장 공부가 재밌어 인터벤션 전문 간호사가 된 수현이는, 4년 전 오늘, 응급 시술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술대를 정리하던 중, 납안경을 낀 눈을 차폐막에 부딪히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최근 수현이는, 내가 다치고 복귀하며 SNS에 쓴 글을 읽고는, 본인이 느낀 감정과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어온 수현이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자꾸 왼쪽 어깨를 이유 없이 세게 부딪히는지 (그저 내가 부주의한 줄로만 알았다) 왜 기존 관계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었는지 왜 이따금씩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이 찾아오는지 우.. 2023. 10. 14.
의사는 환자를 봐야 해 “서연주! , 할 것 없으면 같이 회진이나 돌자.” 오후 내시경이 끝나 무료하게 앉아 있던 내게 교수님이 말씀하신다. 1년차 펠로우 말에는 다쳐서 환자로 입원해 있느라, 2년차 펠로우는 병동 백을 보지 않고 내시경만 하기에, 병동 환자를 본 지가 한참이나 된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다. “의사는 환자 너무 오래 안 보면 감 떨어진다.” “네? 네네.” 갑작스런 오더에 정신 없이 대답을 마치고, 명단 뽑을 새도 없어 노트와 펜 하나를 챙겨들고 급히 교수님을 따라 나선다. 꿈에서도 생각나던 중환자실 비밀번호를 까먹어 충격받을 새도 없이 “꾹꾹꾹꾹 (4670)” 버튼을 스스로 누르고 나를 이끄시는 노교수님. 환자와 말씨름을 하기도 하고, 또 걱정 말라 안심시켜 주기도 하면서 능숙하게 회진을 도시는 교수님의 모.. 2023. 6. 25.
'따뜻함'이란 나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5배는 어른스러운 홍현이다. 사고 후 응급 수술받고 통증으로 헤매는 동안, 홍현이는 손수 만든 도시락을 병원까지 들고 왔으면서도 아파 보이는 날 배려해 아무 말 없이 돌아가 주었다. 아주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미안하던지. 거절에 서툰 나를 두고두고 배려하는 어린 동생의 깊은 마음은 날 오래도록 숙연하게 한다. 어리지만 어른 같은 홍현이는, 이번에는 환한 채광이 드는 자신의 공간에 나를 초대한다. 온종일 준비했을 것이 뻔한, (어쩌면 하루를 훌쩍 넘기는 고민과 노동이 필요했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정성 가득한 음식을 내온다. 사방의 따뜻함 속에서, 나는 사랑이 담긴 장어 덮밥을 꼭꼭 씹어 삼킨다. 난데없이 터진 울음은 이내 이어지는 깊은 대화와 유쾌한 웃음 속에 자취를.. 2023. 4. 10.
슬픔 나눠 들기 내 삶에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치면서, 타인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용기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타인에게 생긴 큰 불행은, 사실 걱정을 빙자한 이야깃거리가 되기 쉽다. 그리고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는 부분도 안다. 하지만, 마음을 쓰고 용기를 내고 연락을 해 주는 것, 그리고 기꺼이 그 슬픔을 나눠주고자 나서는 것은, 그 어려움을 초월함으로써 당사자에게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숭고한 위로로 다가간다. 너무 큰 불행이라 생각되어 다가가기 어렵다면, 더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노력을 하면 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그 또한 언어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문제다. 당사자 뒷편에서 잠깐 스쳐가는 걱정 혹은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거기서 더 가까이, 그리고 기꺼이 앞으로 나.. 2023.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