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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5

멈춤의 미학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쉬기로 한 이후에도 나는 왜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한쪽 끝에서는 ‘욕망’이, 또 한쪽 끝에서는 ‘불안’이 나를 양 끝으로 찢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하고픈 것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많아서 파묻힐 정도로 과한 욕심은 독이리라. 진짜 쉬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피눈물 때문은 아니고 사실은 피똥 때문이었다. (좀 부끄럽지만 뭐ㅋ) 수술 후 4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잃을 정도라 화장실에 수건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시뻘건 혈변이 똑똑 나왔다.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수도없이 봐왔던 환자들 사진과 똑같이.. 갑작스럽고 극심한 LLQ (left lower quadrant, 배를 4사분면으로 나.. 2023. 11. 20.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에 대하여 삶에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지나치게 되는 아픔이 존재한다. 소중한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엄마는 기막힌 산통을 견뎌 내야 하고 유일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 전에, 남녀는 수많은 가슴 아픈 이별을 거친다. 그 아픔의 크기가 상당해서, 인간은 어떻게든 이를 피하려 애를 쓰지만, 결국 그 아픔을 다 삼키지 않고서는 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아픔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던가. 내게 닥친 이 아픔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되는 삶의 한 굴곡이라면, 두려움에 잔뜩 웅크리고 굳어져 자리에 멈춰있기 보다는 손발이 조금 찢기더라도 충분히 아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리. 그리하여 끝끝내 이 아픔을 모두 지나친 뒤에는, 아문.. 2023. 11. 5.
엄마 생일 날 엄마 생일(신) 날, 우리는 아침 일찍 병원에서 만났다. 외래를 차례로 들르고, 서류들을 발급받고, 수납하고 음료수를 사는 동안, 엄마는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글씨를 크게 키운 카톡창을 들여다 본다. 아마 생일 맞이 축하를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하고 있겠지. 같이 외래를 기다리는 환자들을 보면, 70대 노모를 모시고 온 50대 딸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경우가 바뀌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일인가. 환갑을 맞이한 보호자를 대동하고 진료에 올 때 마다, 불효막심한 30대 딸은 마음이 아프다. 차로 이동하면서 내가 물었다. “엄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혼 전으로” 라고 대답한다. 처녀 시절의 엄마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고 싶은 것은.. 2023. 7. 30.
수술방의 인연들 “연주야 괘안노 대단하다 잘될거다” “누나 저 XX에요. 수술 잘 받으세요” “언니 마음 놓고 푹자. 옆에 있을게“ “연주야 걱정 마라. 최선을 다하마” “언니 괜찮아요? 아파요?” 수술방에서, 회복실에서, 인생의 귀인들을 많이 만났다. 인생의 위기는 이런 인연들 덕분에 귀한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모든 지나간 일들에는 다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의 내가 진심과 최선을 다 했다면, 말이다. - 응원해주시고 걱정해주신 분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앞으로 남은 단계들도 차곡차곡 나아가볼게요 😉 2023. 7. 30.
짜증 Annoying 병원에만 가면 짜증 내고 싸우게 되는 일이 생긴다. 몸 상태를 평가할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직전이라 잔뜩 긴장해 있는 데다가, 이놈의 병원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게다가 길은 길대로 막히고, 주차는 왜 이리 어렵고, 외래 위치는 왜 이렇게 찾기 힘든지. 진료가 끝나고는 ‘내가 잘 알아들었나’ 혹은 ‘꼭 이건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는 미심쩍은 불안함과 아쉬움이 남아 내 머리는 온통 복잡하다. 마치 그동안 치른 시험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랄까. 틈새를 비집고 보호자는 자꾸 나를 재촉하거나, 혹은 어디론가 사라져 가뜩이나 힘든 나를 허둥지둥하게 만든다. 어디론가 흩어지고 사라지는 보호자를 양손에 꼭 붙잡고, 수납대에 번호를 찍으려는데, 양팔에 외투와 가방 하나씩을 걸치고 있자니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 2023.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