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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의 미학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쉬기로 한 이후에도 나는 왜 그리 바쁘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한쪽 끝에서는 ‘욕망’이, 또 한쪽 끝에서는 ‘불안’이 나를 양 끝으로 찢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하고픈 것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많아서 파묻힐 정도로 과한 욕심은 독이리라. 진짜 쉬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피눈물 때문은 아니고 사실은 피똥 때문이었다. (좀 부끄럽지만 뭐ㅋ) 수술 후 4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잃을 정도라 화장실에 수건을 대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시뻘건 혈변이 똑똑 나왔다.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수도없이 봐왔던 환자들 사진과 똑같이.. 갑작스럽고 극심한 LLQ (left lower quadrant, 배를 4사분면으로 나.. 2023. 11. 20.
벌써 일년 2023.11.6. 다친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왠지 인생에서 기념(?) 아닌 기억해야 할 날짜가 하루 더 늘어난 기분이다. 막상 그 날이 되니 생각보다 덤덤하게 지나가 버린다. 삼십여년 두쪽 눈으로 살아온 세월을 뒤로 하고, 한쪽 눈으로 쌓아갈 삶들이 차곡차곡 앞에 남았다. 1년 전을 돌이켜보면, 저 컴컴한 병원 건물 병실 한 칸에서 온갖 감정을 거쳤다. 몸에 걸친 얇은 환자복과 팔을 칭칭 감은 수액줄이 한편으로는 날 가둬두는 죄수복과 수갑 같았다. 창문 너머 코앞에 보이던 5분 거리의 자취방은, 당시에는 안개 속에 갇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지금 서 있는 병원 밖 삶도 치열하긴 매 한가지지만, 저 안에서의 삶과 비교하면 터무니 없다. 1년 간 안팎으로 참 고생하며 생존하고 성장해왔다.. 2023. 11. 12.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아픔에 대하여 삶에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지나치게 되는 아픔이 존재한다. 소중한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엄마는 기막힌 산통을 견뎌 내야 하고 유일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 전에, 남녀는 수많은 가슴 아픈 이별을 거친다. 그 아픔의 크기가 상당해서, 인간은 어떻게든 이를 피하려 애를 쓰지만, 결국 그 아픔을 다 삼키지 않고서는 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아픔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던가. 내게 닥친 이 아픔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나치게 되는 삶의 한 굴곡이라면, 두려움에 잔뜩 웅크리고 굳어져 자리에 멈춰있기 보다는 손발이 조금 찢기더라도 충분히 아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리. 그리하여 끝끝내 이 아픔을 모두 지나친 뒤에는, 아문.. 2023. 11. 5.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이 간호사아아아아아!!!!! 아파죽겠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진통제를 안 줘어!!!?” 수술 받기 위해 내가 입원한 병실은 정형외과 병동이었고, 내 맞은편의 환자는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무릎 관절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할머니였다. “죄송해요. 환자분,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저희가 다섯 번이나 연락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아직 답장이 없으세요 ㅠㅠ 지금 안 좋은 환자가 생긴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연락해 볼게요.”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어!!!! 아이고 아파 죽네. “ 병원에서 무척 흔하게 생기는 상황이지만, 병실에서의 씨름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간호사 입장도, 환자 입장도 너무 딱했다. 점점 늘어나는 입원 환자 수에 비해, 값싼 인력인 수련의 몇이 당직을 서는 종합병원은.. 2023. 10. 31.
수현이 우리는, 수현이가 눈을 다친 지 4년 째 되는 날, 처음 만났다. 심장 공부가 재밌어 인터벤션 전문 간호사가 된 수현이는, 4년 전 오늘, 응급 시술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술대를 정리하던 중, 납안경을 낀 눈을 차폐막에 부딪히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최근 수현이는, 내가 다치고 복귀하며 SNS에 쓴 글을 읽고는, 본인이 느낀 감정과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어온 수현이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자꾸 왼쪽 어깨를 이유 없이 세게 부딪히는지 (그저 내가 부주의한 줄로만 알았다) 왜 기존 관계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었는지 왜 이따금씩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이 찾아오는지 우.. 2023. 10. 14.